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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정유정의 환상방황, 떠났던 내가 일상의 나를 두려워 하지 않기를

아이를 낳고 체력이 떨어지기는 했겠지만, 기본 체력 좋다는 믿음이 있어서 운동이나 등산을 싫어하는 편은 아니다. 그렇다고 해서 마음의 상념을 떠나보내기 위한 순례, 올래길을 걷고자 일부러 떠난적은 없다. 만약 내가 새로운 곳으로 떠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면, 그것은 일상의 내가 슬럼프를 겪어 힘들어서가 아니라 새로운 곳에서 새로운 시각을 얻어보고싶은 호기심이 더 큰 것일테다. 

하지만, 가끔은, 요즘처럼 아이 돌보고 일하고 공부하면서 일상이 버겁다 싶을 때는, 혼자 아무도 한국말을 하지 못하는 곳 어디론가 떠나보고싶은 생각이 들 때가 있다. 그런데 또 어디론가 떠나보는 것이 쉬운일인가, 뭔가 이루어 놓은 사람들에게나 일탈이자 자극이지 않을까 하는 시니컬한 생각이 들기도 한다. 물론 그것은 경제적 비용에 관한 것만은 아닐것이다. 선뜻 주변의 양해나 응원을 받아낼 용기가 나지 않는 것일 수도 있고, 돌아왔을 때 지금과 별반 다르지 않을 것이 두렵기 때문이다.

소설가 정유정의 방랑도 그렇게 시작했다. 내연기관의 연료공급이 중단된것 처럼 멀쩡한 기계가 작동을 멈추고 좀처럼 움직이지 않을 때, 작동을 멈춘 시간이 길면 길수록 다시 움직일 가능성이 줄어든다는 생각이 들 즈음 무작정 히말라야 행을 결심했다. 다소 엄살도 섞였겠으나 영어도 못하고 운동실력 없는 중년 초입의 아줌마가 무작정 외국의 오지로 떠난다는 결심을 누가 응원할 수 있었을까. 보내준 가족도 대단하고 하고자 하는 이에게 길이 열린다는 말처럼 실력자들이 나타나서 이 문제투성이 아줌마를 정말 100점만점에 200점으로 여행을 마무리 짓게 해주었다. 

비록 일단은 이 책을 통해 대리만족을 하긴 했지만, 나에게도 히말라야 여행 하나쯤 앞으로 맞을 계기가 있을 거라 생각한다. 그 당시에는 무척이나 힘들고 고뇌에 차겠지만, 그 상황을 양해받고 환경을 바꾸어 충분한 시간을 보낼 수 있는 그런 자유로운 시간말이다. 

책은 히말라야 트래킹의 정보를 꽤 충실히 담고 있으면서도 소설가 특유의 해학과 깊이있는 삶의 관찰력이 넘친다. 125페이지에서 비로소 '환상방황'이라는 말이 나왔을 때, 이 여행기의 재미가 무르익었다. 처음에는 뭐 이런 대책없는 아줌마가 다 있나 싶었다가 인간 본성의 밑까지 내려가 고민하는 작가에 몰입되었다가 질끈 눈물도 흘렸다. 즐거움, 슬픔이나 깨달음 때로는 악동같은 행동들이 내 속을 시원하게 긁어주는 느낌이었다. 

자연에의 경외감과 사실감 넘치는 문화 묘사 외에도 지금 여기에서 각각의 고민과 피로를 가진 이들에게 자신의 솔루션을 하나하나 들려주는 것만 같았다. 엄마의 죽음과 첫딸이라는 인생의 무게와 소설가가 되기까지의 단편단편의 추억들, 어쩔 수 없이 마딱뜨리고 마는 신체적 한계에서 그는 속절없이, 그래서 내려놓고야 말았다. 내려놓고 나니 보이는 것들을 소설가의 필력덕에 실감나게 간접경험하고보니 나조차도 아주 똑같이는 아니어도 히말라야의 정기를 받은것마냥 마음이 편안해지는 것 같았다. 

함께 여행을 했던 혜나는 흐트러짐 없는 여행을 꾸리는 성실함이었다면 검부의 지혜, 버럼의 순수함을 가졌다. 오직 글쓴이 자신만 음식이 맞지 않아 며칠을 굶고 며칠은 변비로 화장실 문제를 겪고 며칠을 고산병 증상으로 고민을 했으며 길을 헤매거나 급기야 동네 강아지들에게도 무시를 당하는 천덕꾸러기의 못난 모습이었다. 

책을 덮고 조금 시간이 지나고 나니, 어쩌면 아무 정보 없이 무대뽀로 여행을 준비한 아줌마를 덜렁 따라나섰던 혜나, 자부심이 높은 가이드 검부, 해맑은 짐꾼 버럼은 어쩌면 길을 떠났던 작가 자신의 또다른 일면이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일상의 성실하고 프로패셔널함, 여러 책 속에서 삶의 정수를 뽑아내어 적용시켜보는 지혜로움, 소설 속 인물이 되어보지 않고서는 만족할 수 없어 한밤중 산속을 헤맸던 순수함, 그리고 잠시 일상을 떠나 훌렁 솔직한 자신의 모습을 드러낸 솔직함이라는 아이덴티티들이 한데 모여 여행을 했더라는 생각이다. 

누구에게나 솔직하지 못하고 또 도망가고 싶고 어쩌면 두려움을 만용으로 뒤덮으려는 되도 않는 시도를 해본 경험이 있다. 그리고 한번은 가라앉아 바닥을 치고 힘들어서 누가 손한번 잡아주었으면 하는 시기가 있을 수 있다고 본다. 아니라는 사람들은 이 글의 첫 문단의 나처럼 스스로 그 사실을 알아채지 못하고 있을 지도 모른다. 

이 책은 친구로부터 선물받은 책이다. 아마 직접 서점에서 골랐다면 손에 들리지 않았을, 내 관심과 조금 떨어진 주제의 장르의 작가의 책이었다. 하지만 이건 운명처럼 내게 책이 온 것이라 믿고 싶다. 그 속에는 장녀로 초보 엄마로, 아직 사회생활에서 커리어가 자리잡히지 않은 불안한 한 아줌마가 거울을 들여다보듯 들어 앉아있었기 때문이다. 

비로소, 장효진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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