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정치적인 이야기를 하려고 이 글을 쓰고 있지 않습니다. 단지 최근 일은 책인 <불통의 시대 소통을 읽다>라는 책과 몇몇 책을 연결하다보니 우리나라의 지금 여기에 대한 생각이 있어 몇가지 생각을 붙여보고자 합니다.


이 책의 서두에는 이런 말이 나옵니다.

'커뮤니케이션이란 진심(사실)을 말하지 않은 정보 제공자와 메시지를 자기 취향에 맞춰 해석하려는 수신자 사이의 항구적인 협상과정이다.'

정보를 제공하는 사람들이 전하는 사실이라는 것도 어떻게 보면 그것을 전달하는 사람의 관점과 취향이 반영되고 때로는 그의 의도대로 가공될 여지가 크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받아들이는 사람도 마찬가지로 자신의 잣대로 그것을 받아들이게 되는 것이죠. 우리는 항상 이러한 주고 받음에서 마뜩치않은 것들을 받아들이고 수용하면서 몇몇은 인정하고 몇몇은 흘려들으며 협상을 계속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본다면 소통이라는 것은 참으로 불편하고 골치아픈 일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소통(疏通)이라는 한자어도 통하다는 의미뿐만 아니라 서로의 장벽을 깨다는 의미가 붙어 '막힘이 없이 통하다'라는 말이라고 하던데요. 앞의 이야기와 이 말이 딱 맞아떨어지는 대목이 아닌가합니다.

저뿐만 아니라 우리나라 대부분의 사람들은 최근 1~2년 사이에 SNS등의 가능성에서 유영하고 있습니다 그 가능성이 얼마인지조차 가늠하기도 힘들다고 이야기 하면서 말이지요. 지금까지 기술의 발달에 의해 사람들은 기계, 기술의 이데올로기에 매료되어 끌려온 것이 사실입니다. 기계가 바라는 패턴화와 합리성이라는 것이 항상 옳은 것이라고 생각되기조차 했구요. 저 조차도 공학을 전공하면서 기술의 합리적인 의사결정에 인류가 이만큼 편리해지고 행복해질 수 있었다고 생각해왔었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기술들의 발달에 이끌려 숨차게 살아가고 있는 지금, 그런 소통의 기계들 즉, 라디오, 전화, 텔레비전과 컴퓨터와 웹의 발달과정에서 얼마나 주변과의 소통을 이루어 내었느냐고 묻고 싶습니다. 볼통이 이야기 한 것처럼 사람들은 더 많이 섞이고 다른 이들을 접촉할 기회는 많아졌지만 그들과 소통할 시간은 너무도 적은 것은 아닌가 합니다. 이러다가는 정말로 더 많은 갈등과 불소통이 만연해질 지도 모를 일이죠.

 


프랑스 국립 과학 연구센터 리서치 디렉터이자, CNRS산하 소통과학연구소 소장이며 30여년간 커뮤니케이션을 연구한 프랑스 최고 석학 중의 한 사람이라는 도미니크 불통의 책입니다. 학자의 글이라서 다소 딱딱하기도 하고 어려운 용어를 섞은 만연체는 읽기가 부드럽지는 못했네요. 그래도 뒤쪽의 저널리스트와의 대담을 글로 옮겨 적은 부분은 앞 선 글과는 달리 잘 읽히는 편입니다. 볼통의 생각을 좀 더 다양한 방면에서 알 수도 있습니다.


최근 '나는 꼼수다'라는 팟캐스트 음원이 많은 반향을 일으키고 있습니다. 정치에 관심이 없거나 멀어진 세대의 정치에 관심을 되돌려 놓고 적극적인 참여를 이끌어내었다는 평가도 있고, 그들의 의견을 다른 시각으로 접근하려는 시도가 부족하여 너무 한편으로 치우친 것이 걱정된다는 의견도 있습니다. 

이 책을 읽으면서 저자가 이야기한 그의 세계, 즉 유럽연합이라든지 그가 확장한 남미의 소통으로 연결된 공동체라든지의 이야기에 저는 우리나라의 사정을 돌아보게 되었습니다. 볼통이 이야기한 기술 이데올로기에 의해 우리는 많은 발전을 이루어 온 것이 사실입니다. 그것으로 이만큼 잘 살게 되었지요. 하지만 그가 이야기 한 정체성과 문화를 이해하는 소통에 관한 다음 인문학적 이데올로기로 가는 과도기에서 우리나라가 어떠한 성공을 이루어 낼지 궁금해집니다.

여기에서 '나꼼수'의 반향이 우리 사회에 많은 의미가 있다고 여기게 되었습니다. 그들의 시시껄렁하고 다소 정신 사나운 이야기들을 듣고 낄낄 웃다보면 그들은 '소설'이라는 데도 왠지 사실인 것 같고 그들이 전달하는 메시지를 나의 취향과 맥락을 곁들여 내 안에서 협상을 만들어 냅니다. 그리고 그들이 한 이야기의 100%가 아닌 나의 이야기 100%가 만들어지는 소통을 경험하게 되는 것이었죠.

그래서 고무적이지 않을 수 없습니다. 볼통이 이야기 한 기술 이데올로기는 그것이 목적이 되는 것이 아니라 좋은 수단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고 그것의 폐해라고 이야기 하는 수단 뿐인 세상을 견제하는 것이죠. 즉, 스티브 잡스가 만들어 놓은 아이팟(아이폰)에 들어가는 음원들이 누구나 부담없이 자의적으로 접하게 되었고 그것을 통해 스스로 '소통'을 시작하였다는 것입니다. 일방적인 방송으로 무의식적, 피동적으로 듣는 것이 아니라 생각을 더하고 반응을 통해 직접 움직이면서 여러가지 움직임을 만들어 내었다는 것으로 알 수 있지요.

<큐레이션>에서 이야기 하는 큐레이터의 작용, 그리고 <생각 조종자들>에서 이야기 하는 다양한 관점에서 바라보는 중요한 사안에 대한 넓은 관심에 대한 이야기와 어우러져, <불통의 시대 소통을 읽다>는 중간단계에 대한 직무수행을 연결하여 본다면 '나꼼수'라고 하는 것은 민주주의라고 하는 것이 중간단계의 주체와 직무를 제거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비판 능력과 역할을 인정하는 것이며, 중간 단계와 반권력은 이러한 중간단계자인 기자와 같은 것이 아닌가 합니다.

그래서 우리나라는 '나꼼수'를 통해 볼통이 이야기 한 것 처럼 우리나라도 이제는 '어떻게 하면 정보에 관해서는 거인이며, 행동에서는 난쟁이가되어 버리는 괴리감을 줄일 수 있을까'를 고민하게 된 것은 아닌가 합니다. 지금까지 기술적 이상이 발신자와 메시지, 수신자들이 일직선 위에 있다고 생각하였지만 이제는 소통의 문을 열고 갈등의 문을 닫을 수 있다는 사실을 받아들여야 하는 것이죠.

또한 '나꼼수'가 영리하다고 느껴지고 소통과 관련하여 다시금 보게 되는 것은 문화와 커뮤니케이션 산업들이 미래의 정치적 갈등에서 핵심이 된다는 견해와 맥을 같이 놓고 보면 그렇습니다. 그들은 팟캐스트 음원을 끈질기게 1주에 한번은 올려놓고 그들의 책을 통해 못다한 이야기를 하고 오프라인 강연회를 통해 문화적 공동체를 만들어 나갑니다. 각종 CM송들이 넘쳐나고 그들의 캐릭터가 들어간 티셔츠가 입소문으로 매진이 될 정도라지요.

이제 우리는 다원적인 세상에서 살아가고 있다고 느끼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혼혈인인 오바마가 미국의 대통령이 되고 유럽이 연합이 되어 다양한 사안을 함께 고민하고자 합니다. 여기에 우리도 다양한 목소리를 들은 준비를 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하나로 규격화된 법제나 인식을 넘어 나의 정체성을 만들어 나가려는 노력이 선행되고 그것을 융합하고 공존하려는 노력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역사와 정치 그리고 예술에 이르기까지 소통에 대하여 이야기 하는 저자의 생각을 접하면서 생각의 스펙트럼이 조금은 넓어진 느낌이 들었습니다. '나꼼수'를 예로 들기는 했지만, 앞으로의 우리는 가상세계와 웹이라는 기술의 화려함에 너무 많은 시간을 들이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합니다. 주변의 진짜인 것들에 대한 관심과 행동이라는 인간 본연의 모습을 충분히 지키고 자신의 정체성을 가꾸고 있는 가가 무엇보다 더 중요하다는 생각을 많이 했어요. 그래야 메시지를 보내는 발신자와 협상할 주체로서의 수신자가 될 수 있으며 소통을 이루어 낼 수 있을테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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냉전시대는 끝이 났다. 

고등학교 사회시간에 배웠을법한 이야기지만, 소련과 미국 양대국의 힘겨루기는 정치뿐만 아니라 문화, 경제 등 다양한 곳에 걸쳐 이뤄졌습니다. 그 가운데 수 많은 나라들은 그들을 기준으로 이열 종대로 길게 줄을 섰었죠. 그래서 자연스럽게 흑백논리라는 것에 의해 나와 다른 것은 곧 틀린 것이 되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분명 '다른 것'은 '틀린 것'이 아님에도 말이죠. 
 


다름을 인정하는 것은 편나누기가 뚜렷한 그 경직된 사회에서는 힘든 일일 것입니다. 그리고 그 다름이 '특출남'일 때는 더더욱 인정받기 힘들어 질 것입니다. 특출나지 않은 자가 조직의 뒤에서 비겁하게도 그 특출남을 무력화 시키기 손쉽기 때문이지요. 모난 돌이 정맞고 튀는 사람은 언제나 공격의 대상이 되어 많은 좌절을 받아온 것이 사실이기도 하지요.

하지만 이제 우리는 좀 더 다양함을 이해할 수 있는 유연한 곳에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적어도 나는 각자가 나름의 개성을 가지고 있고 서로다른 매력으로 사랑받을 가치가 충분하다고 믿고 있습니다. 물론 영화에서도 엑스맨들은 사회의 그늘에서 살아왔었지만 마침내 그 다름을 존중해줄 서로를 찾았고, 자신의 존재와 미래를 함께 보고 발걸음을 옮기며 끝을 맺지 않았습니까.

조금 비약을 해보자면 영화를 보면서 현실에서의 우리도 각자 개성을 이해하고 다른 사람의 그것을 인정하는 여유로움을 가질 수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재미있는데 나혼자 시큰둥하거나 내가 하는 이야기를 다른 사람들이 귀기울이지 않는다고 문제될 것이 아니죠. 또 비뚤어진 코를 가진 사람이 다른 사람들이 모두 내 코만 보는 것 같다고 여겨 고개를 숙이거나 하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어차피 우리는 다르고(꼭 같기가 더 힘들죠.) 그 다름을 인정하지 않는 것이 무지함이니 괜히 그것에 상처받지 말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이렇게 생각하니 스스로도 기운이 납니다. 나를 그대로 인정하는 것은 언제나 쉬운 일은 아니었습니다. 주변의 사람들을 따라하는 것은 결국 나를 버리는 것일지도 모르고 그것을 그들도 원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다시한번 깨닳았지뭡니까.

잠깐 나와주셨던 울버린이 반갑기도 했고, 이후 대결구도가 이렇게 우정어린 관계에서 나왔다고 하니 엑스맨 시리즈에 더욱 애착기 가게 된것도 사실입니다. 영웅물 시리즈의 그 시작이 어떻게 되었는지에 대한 호기심을 충족시키면서 내 자신의 존재와 다름을 인정하는 유연함을 주제로 삼은 것은 이 영화가 사랑받을 수 밖에 없게 만드는 이유가 되지 않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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